러시아 정치론 5
5. 러시아의 정체성 : 신유라시아주의
수정주의적 국제주의의 인식에서 러시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한다. 러시아 내부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정체성 논의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단연 ‘신유라시아주의’이다. 신유라시아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표적인 그 이론가인 파나린(Александр Панарин)과 두긴(Александр Дугин)의 주장을 집중적으로 확인 할 필요가 있다.
먼저 파나린은 전통적 독재 국가의 필요성, 서구에 대한 거부, 정교 정신의 복원 등을 주장했다. 그는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 발전이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도덕적ㆍ종교적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서구의 위기에 대응하고자 러시아 정교를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교를 통한 ‘기독교성’의 회복으로 현대사회 지배적인 서구의 쾌락주의ㆍ개인주의ㆍ소비문화를 극복하고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두긴의 유라시아주의는 지정학적 전통과 연계되어있다. 그는 세계를 4개의 문명권(미국 권역ㆍ아프리카-유럽 권역ㆍ아시아-태평양 권역ㆍ유라시아 권역)으로 구분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현재까지 지속되는 서구ㆍ해양 세력의 도전에 대항하여 유라시아 권역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그 구심점으로 러시아 정교적 가치의 회복을 강조했고, 러시아 민족의 인종적 정체성을 개개인보다 우선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이론가 이외에도 신유라시아주의는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나 공통적으로 유라시아 공간을 이외의 공간과는 다른 역사와 가치를 가진 특수성을 가진 하나의 지역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있다. 또한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 서구와의 차이를 보여주는 러시아 정교의 정체성에 기초한 발전 모델,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에 대한 옹호가 공통적으로 식별되는 신유라시아주의의 주요 주장이다.
구성주의 이론에 따르면 정체성은 외부에 대한 인식, 내부 정체성의 공고화, 정체성의 정당화 기재를 제공한다. 따라서 신유라시아주의를 통해서 러시아 외교정책개념이나 국가 안보 정책에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러시아의 대응도 이 같은 관점에서 설명된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위기는 우크라이나의 지역별 인구 및 산업구성에서 오는 차이와 그로 인한 구성원들의 인식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농업 위주의 서부지역은 러시아 민족의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나(10% 수준) 공업 위주의 동부지역은 러시아인 인구 비율이 높았다(40~70% 수준). 그에 따라 서부는 친서방적 정책을 지지하는 한편 동부는 친러시아적 정책에 지지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극심한 내부 갈등을 만들었고 이는 오랜지 혁명을 통한 정치적 혼란과 이후 유로마이단 내전을 야기했다. 동부의 일부 지역에서의 분리독립 요구에 우크라이나 당국은 강한 탄압으로 대처하였고 이에 러시아가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군사적 개입을 단행했고 이후 크림반도와 돈바스지역을 강제적으로 병합하였다. 신유라시아주의적인 인식 틀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문명 내부의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유라시아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개입은 러시아적 가치와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유라시아주의에서 강조하는 유라시아적 특징으로 여겨지는 권위주의 및 집단주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대외정책과 국내정치를 동일한 논리로 이해하도록 한다. 즉 유라시아의 발전이라는 대의로 유라시아 종주국인 러시아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하며 개별행동을 하는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강압적 조치를 해도 된다는 것이다.
6. 푸틴의 대응 : 강한 국가 만들기
푸틴은 신유라시아주의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라시아 대륙에서 러시아가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강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다. 옐친이 조기 사퇴하고 푸틴이 잔여임기를 대행하는 식으로 국가를 물려받았을 때 러시아는 심각하게 허약한 상태였다. 탈냉전 초기 러시아는 시장 경제체제로 성공적인 체제 전환에 실패했고 금융위기 등의 혼란 과정에서 서구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었다. 옐친 집권기에 뚜렷한 정책적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았고, 크렘린 내부의 권력투쟁과 올리가르히와 권력 엘리트들의 정경유착으로 부패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특히 1998년 여름에는 국가부도(moratorium)의 사태에 직면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집권한 푸틴은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강한 국가를 통해서만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과 같은 국내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강한 국가는 정책집행 능력(국가능력) 측면의 정의로 국가의 독점적 강제력과 통일적 권위 그리고 제반 법률적, 행정적 장치를 그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푸틴은 줄곧 국가기강 확립을 위한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지방에 대한 중앙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89개의 연방구성주체에 대통령 전권대표 ‘폴프레드’(полномочный представитель президента)를 임명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지방의 이해를 대변하던 의회 내 상원 대의원을 대통령 임명제로 바꾸어 실질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이와 동시에 옐친 시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간주 되던 재벌 중 몇몇을 본보기로 처벌하고 전반적으로 이들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보안부서 출신의 푸틴 측근이 실로비키라는 이름으로 권력의 중심에 진입했고 그들의 성향이 국내외 정책의 기획 및 집행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언론(상당수가 재벌 소유) 및 의회(하원)이 결정적으로 약화 되었다. 특히 2004년 체첸 반군이 주도한 베슬란 인질 사건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하였다.
푸틴이 만들고자 하는 강한 국가에서의 ‘강함’은 전자와 같은 ‘국가능력’측면의 강함뿐만 아니라 ‘국력’측면의 강함도 해당된다. 이것은 그가 집권 초기부터 주장했던 ‘강한 러시아’의 건설을 통해 드러난다. 푸틴은 취임사에서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러시아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표명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2000년 취임시 「신군사독트린」을 천명하였고, 2008년 그가 총리로 재임 시에는 「2008 군 현대화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등 1918년 적군 창설 이래 가장 혁신적인 일련의 군사개혁을 실시하였고, 일정 수준의 군의 현대화를 달성하였다. 또한 고유가 추세에 힘입어 연평균 6.5%의 지속적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경제력의 급격한 회복과 에너지를 무기로 한 외교력은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발언권을 크게 높였다. 이를 기반으로 푸틴은 “미국이 지배하는 단극체제는 파멸적”이라면서 서방과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기조 속에서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푸틴의 러시아는 대외적으로 과거와 같은 강대국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며 그에 따라 러시아의 이익과 명예를 적극적으로 수호하며 지역 내에서의 영향력을 높이려 시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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