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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치론 3

엔와이92 2023. 7. 16. 20:11

3.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1991년 12월 26일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국제주의는 냉전 이후 국제사회의 지배 질서인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한 적응과 서방으로의 통합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된 역사는 러시아의 좌절감과 희의감의 연속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기득권 세력의 반동을 우려하여 ‘충격요법’이라고 지칭되는 급진적 개혁프로그램을 실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국가 전체적 혼란이 연속해서 발생하였다. 반면 탈냉전 직후 미국은 클린턴 집권기에 1980년대부터 미국 경제를 괴롭히던 쌍둥이 적자 문제 즉,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해결되었고, 마이크로소프트 주도의 IT산업, 월트 디즈니 주도의 오락산업 등의 첨단산업이 크게 발전하는 등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혹자는 이 시기를 1920년대에 이어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로 생각했고 로마의 전 세계적 패권에 빗대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불렀다.

 

러시아로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거와 같이 제 2세계 국가의 수장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 수 없었다. 그 대신 미국이 구축한 국제질서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편입되고자 노력했다. 그에 따라 자유주의 모델을 반영한 시장경제 체제로 체제 전환을 시도하였고, 유럽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기대와 희망은 “러시아가 ‘역사적 서방(Historical West : 러시아를 제외한 과거 전통적 유럽)’에 가입하면 ‘더 위대한 서방(Greater West :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이 될 것”이라는 표현으로 주장되었다. 러시아는 서방이 자본주의 세력에 적대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고, 소련의 국가 정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체제 전환만 성공하면 이후에는 적극적인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와 유럽은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체성, 그것을 반영한 경제ㆍ정치ㆍ안보전략 문화에서 상호 수용하기 어려운 점과 자주 직면하였다. 특히 서방 국가들에게 있어서 러시아는 유럽 국제사회에 편입되기에는 너무 크고 부담스러운 ‘다른 유럽(the other europe)’이었고 러시아의 ‘역사적 서방’ 가입은 기존 서방국가들의 규범ㆍ제도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 판단하였다. 러소포비아(Russophobia)는 이러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반영한 단어로 러시아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완전히 변화하기 전까지는 이웃 국가들 및 세계 질서에 지속적으로 위협을 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러시아와 서방은 상호 이질성을 극복하기 점점 더 어려워졌고 2000년대 중반에는 상호 소외가 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냉전의 종결 방식에 대해서 러시아는 미국-유럽 국가들과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의 입장은 냉전의 종식이 소련 붕괴 2년 전에 실질적으로 이루어졌고, 냉전의 종식과 탈 공산주의는 서방의 압박이나 축적된 소련 내부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 아니라 고르바쵸프의 주도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스티브 코헨은 고르바쵸프의 노력이 없었다면 냉전은 훨씬 오래 지속되고 악화 됬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고르바쵸프는 냉전의 종결과 및 이후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의 국내적 변화 노력을 통해 러시아 고유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국제정치 무대에서 동등한 일원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과 서방은 냉전의 종식을 그들의 준군사적 전쟁에서의 승리로 간주하였고 그들 자신을 전쟁의 승리자로 생각했다. 그에 따라 러시아는 종속적ㆍ굴욕적 조건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러시아의 행동들은 줄어든 힘에 비해 너무 큰 위험한 야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구체적은 냉전의 종결 방식에 부당함을 느꼈다. 냉전 시기 제 1세계를 결속했던 주요 기구들(NATO나 EC)은 유지되는 반면 제 2세계를 결속했던 공산주의 이념은 물론이고 주요 국제기구들(바르샤바조약기구와 상호경제원조회의)은 단기간에 큰 저항 없이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다. 사콰(Richard Sakwa)는 이를 ‘비대칭적 냉전 종결(the asymmetrical end to the Cold War)’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로 하여금 일종의 울분(Grievances)을 느끼도록 하였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탄생한 브레튼우즈 체제(1944년)에서 시작하여 나토 창설(1949년) 그리고 냉전 시기의 미국의 자유주의 가치 수호와 전파 노력 등에 의해 이어졌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크게 3가지 요소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요소는 국제제도들에 성문화된 ‘규칙 기반 질서(rules-based order)’의 창출이고, 두 번째 요소는 미국이 공정한 안전 보장자 역할을 하는 동맹관계의 수립이며, 세 번째 요소는 인권ㆍ민주주의 등 합리적 자유주의적 가치의 확산 노력이다. 이러한 보편적ㆍ합리적ㆍ개방적 가치에 기반한 국제질서 하에 전후 서방은 경제적ㆍ정치적 부흥과 및 번영을 이룩했다. 러시아는 그들이 기꺼이 통합되기 희망했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지배적 규범이 보편타당한 가치에 기반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미국 및 서방이 말하는 ‘보편’적 규범에는 모종의 이중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러시아는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는 보호책임(R2P : Responsibility to Protect) 원칙과 이에 근거한 ‘인도주의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정책에서 그것을 간파했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대의명분 속에 그들의 국익 추구를 교묘히 감추었고,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는 개입은 패권적 내정개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탈냉전 이후에도 지속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이하 NATO)의 확장과 BMD(Ballistic Missle Defence) 프로그램은 러시아에게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게 했다. 냉전의 종식 이후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없는 상황에서 나토는 새로운 역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러시아는 NATO에 가입하고자 하였으나 거부되었다. 반면 러시아를 제외한 포스트 소비에트 구역의 국가들은 지속적으로 NATO 체제에 편입되어갔다. 이와 관련하여 냉전 초기 소련에 대한 봉쇄전략의 시행을 주장했던 조지 케넌(George Frost Kennan)조차도 다음과 같이 경고했었다. “나토를 확장하는 것은 냉전 이후 미국이 취한 정책 중 가장 치명적으로 잘못된 정책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러시아를 자극하여 그들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외교를 하도록 만들 것이다”. NATO의 확장도 문제였으나 러시아에게 가장 큰 전략적 위협을 느끼게 한것은 BMD였다. BMD는 1980년대 전략 방위 구상(SDI :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레이건이 미국이 핵 선제공격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책이 없음을 발견하고 탄생한 전략으로 지상기지, 또는 우주기지(위성)에서 강력한 레이저 광선이나 입자 빔을 발사하여 비행 중인 탄도미사일을 격파하려는 방위계획이다. 냉전 이후에도 미국은 제3세계로의 탄도미사일의 확산, 이로 인한 우발적 핵미사일의 잠재적 사용 가능성에 대비하여 BMD의 확대를 가속화 하였다. 그에 따라 미군은 폴란드에는 대공미사일 기지, 체코에는 레이더 통제 센터를 설치하였고 이는 러시아의 군사적 위기의식을 심각하게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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